올바른 답을 찾지 못하는 이유
우리가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할 때, 어쩌면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길을 가려고 할 때 이 길이 옳은 길인지 고민한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모으기 위해 이마를 맞댄다. 모여서 이야기 한다는 것은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고 토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의에서 큰 성과를 거두긴 어렵다. 대부분의 회의는 정형적이고 보수적이어서 모든 의견을 수렴하기가 어려운 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몇몇 사람의 의견에 순응할 뿐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주장이 반영되는 경우를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고전이라고 불리는 '자유론'을 저술한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의견이 본인에게는 모를까 다른 사람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고 따라서 그 억압이 그저 사적으로 한정된 침해일 뿐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억압을 받는 사람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억압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행위가 현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강도질을 하는 것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개별성을 매우 강조한다. 많은 대기업들이 겉으로는 혁신을 표방하지만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이 스타트업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올바른 토론이란
올바른 토론이라는 것은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절충하고, 합의하고, 화합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높은 사람의 의견을 밀어붙친다 한들 진일보할 수 없다. 정치적 관심이 높아진 최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정치인들의 토론 장면을 볼 수 있다. 토론은 서로의 주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주장은 근거 즉, 논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토론은 보수와 진보라는 자기 진영에 매몰되어 서로의 주장을 논증할 생각은 안 하고 논증 없이 주장만 할 뿐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취향'과 '주장'을 구분해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짜장면이 좋아'라고 말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개인 취향이며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으며, 짬뽕을 먹는다고 해서 상대를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주장'이라는 것에는 논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논증하지 않고 주장만 하는 사람들은 속 빈 강정일뿐이다. 이러한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꾀 내는 데도 능숙하다. 그렇다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항에 대해 상대방의 모든 주장에 논증을 들먹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을 낭비하게 하며, 자신을 굉장히 외롭게 만들 것이다.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만 논증을 요구하면 되는 일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라고 했던가. 논증 없이 주장만 하는 사람들과는 토론이 되지 않는다. 논리와 무논리가 대결을 한다면 무논리가 이길 수밖에 없다. 논리는 자신의 모든 주장에 논증해야 하지만 무논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논리가 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토론을 못하는 이유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어른에게 말대꾸한다며 논리적인 주장을 펴는 자녀를 혼내왔다. 이것은 자녀의 창의력과 논리력을 죽이는 행동이다. 이러한 간극은 좁혀지지 않아 갈등으로 비화된다. 현대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수많은 갈등을 목격해왔다. 전쟁 직후에는 이념갈등, 그 후에는 지역갈등, 현재는 남녀 갈등과 세대갈등이 가장 두드러진다. 이러한 갈등의 발단은 서로 대화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이익을 보는 집단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익집단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를 들어보자. 이념갈등이 극에 달 했을 때, 우리는 국가로부터 반공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가장 잘 학습한 학생이 우수한 인재가 되었다. 꼭 그것을 잘 학습하지 않았더라도, 이전 시대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시하며 국가로부터 이념교육을 강요받았다. 그러한 교육을 통해 가장 이익을 본 집단은 어디인가. 사실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각 개인은 아무 잘 못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교육받은 것이 정의이며, 그것이 옳다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를 뿐 그곳에 선악은 없다. 다만 현재의 관점으로 지난 과오를 모두 처벌해야 한다면, 학창 시절 훈계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선생님들은 모두 해임당해야 마땅하다.
토론을 해야하는 이유
토론이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야하고, 또 자신의 의견은 간결하게 말해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의 토론은 굉장히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는 당연하겠지만,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방의 의견은 귀담아듣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이 파란만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나름의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왔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개인의 가치관이나 신념이 생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것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토론을 할 때는 이러한 신념은 잠시 접어두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 보아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자신이 말할 때는 귀 기울여 줄 것이다. 불교 용어 중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지혜'를 뜻하는 '쁘라냐'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집착과 억압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토론을 위해서는 이와 같은 마음가짐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누군가와 '진정한 토론'을 하고 싶다면 한 가지 주제를 정한 뒤 그에 관련된 책을 각자 읽고 토론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각자의 생각이 정리되어 말할 수 있으며, 감정이 앞서기보다는 이성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 자신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에 따라서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서로 동일한 주제의 책을 읽고 토론하면 대부분은 대립보다는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토론이 진행된다. 우리가 서로 싸우고 상처주기 위해서 토론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토론은 상대방의 의견에 귀 기울여 화합하고, 각자의 좋은 의견을 모아 더 좋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안에 떨지 않는 최고의 투자 방법 (0) | 2022.02.22 |
---|---|
당신이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이유 (0) | 2022.02.15 |
평생 함께 하는 관계를 만드는 방법 (0) | 2022.02.10 |
성공을 위한 3요소 '선택, 도전, 집중' (0) | 2022.02.08 |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이 것' (0) | 2022.02.07 |
댓글